[전문가 칼럼] 올레길에서 길을 묻다

무언가를 꼭 집어 떠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알 수 없었다. 올해 광합성 활동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그냥 혼자 무작정 걷고 싶었다”가 맞을 것 같았다.

어느 여행 작가가 말했듯이, 길을 걸을 때는 “무엇보다 철저히 혼자 이어야 한다” 그리고 “버리고, 준비하지 말고 떠나라”는 원칙을 따랐다. 허용하는 최대 기한 내, 떠나고 돌아 올 날짜만 정해 티켓팅을 했다. 그리고 과거 다 못 걸은 제주 올레길을 걷기로 했다. 그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정하지 않았다. 하루에 걸어야 할 일정과 코스, 묵을 숙소 예약 등 모든 것들을 계획되지 않은 우연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길에서 마주칠 사람, 이름 모를 풀과 꼿들, 산과 들과 오름, 온전히 보이는 대로 보고, 몸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꼭”이라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 싶었다. 꼭 먹어야 할, 꼭 봐야 할, 꼭 사진 찍어 두어야 할 것들, 의식적으로 모두 무시하려고 했다. 그냥 모르는 길에 앉아 피우는 담배 한대와 어스름한 바닷가 석양에 회 한접시와 소주 한잔의 소중함을 느껴보려고 했다.

정한 것은 있었다. 걷는 사람의 기본 원칙대로, 꽤 부리지 않고, 나의 짐을 오롯이 두 어깨에 짊어지고, 쉼없이 연속하여 목적지까지 두 발로 걷기로 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꼭 다 걷지 못하면 어떠하리~~ 놀멍, 쉬멍, 걸으멍, 지내려고 했다.

걷는다는 것은, 인간이 직립 보행을 시작한 이래로, 인간의 타고난 가장 본능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가장 공평한 것이 아닐까 한다. 두 발이면 족한 것이다. 인간의 욕망인 남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와는 거리가 먼 가장 비효율적인 활동일 수도 있다.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은 많다. 빠르게 가기 위하여 자동차를 이용한다. 대부분 올레길의 해수욕장에는 여행객들의 렌터카가 주종이며, 그들은 짙게 선팅이 드리워진 차로 이동하여, 필수적으로 먹어야, 사진을 찍어야, 가보아야 하는 곳에 주차한다. 그리고는 차문을 열고 나와 사진을 찍는다. 대부분은 흔히 이야기하는 “쎌카”이다. 멋지게, 분위기 있게, 인생 샷이 나오기를 기대 하면서, 그날 밤이면 인스타그램 등의 SNS에 올라 갈 본인의 멋진 사진을 상상하며. 그 속에서는 “스스로 그러하다”는 自然(자연)이 없다.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자신의 모습만이 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없다.

그리고 걷는 사람의 특징은 “쎌카”의 비중이 아주 적거나 없다는 것이다. 땀에 절어, 냄새 나고, 초라한 본인의 모습은 그닥 찍고 싶지 않기도 할 것이다. 대신 재미있는 놀이 거리가 있다. ‘그림자 놀이’라고 한다. 그들의 분신인 그림자나, 그들이 이고 지고 간 배낭이나, 스틱을 찍는다. 어느 오름에 수줍게 핀 이름 모를 들풀을 찍는다. 유명한 식당이 아니어도 좋다. 그냥 배고픔을 해결해 줄 곳이면 족하다. 숙소는 그냥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거소의 목적이면 된다. 바다가 보이는 멋지거나, 편한 장소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몸을 의탁할 수 있고, 씻을 수 있고, 빨래를 할 수 있는 곳이면 족하다. 즉, 가장 기본적인 욕구만 해결하면서, 본능적으로 배운 걷는 행동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느리게.

올레 길은 전보다 많이도 변해 있었다. 일단 10여개의 올레길이 신설되어 있었고. 종전의 리본이라는 표식과 함께 화실표로 걷는 이들을 안내하는 길들이 많아졌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대부분 참 “친절”하다. 그 어떠한 최신 문명 기기인 GPS나 구글맵이 없어도 족하다. 리본이나 화살표를 따라 걸으면 된다. 갈림길이 나오면, 미리 예고를 한다. 화살표 또는 리본으로 갇는 이들을 안내한다. 그리고 한 번 더 “당신은 올바른 길에 접어 들었다”는 표식으로 확신을 준다. 그리고 일정 거리를 걷다 보면, 맞게 걷고 있나? 약간의 의심이 들 때쯤이면, 여지없이 안내 표시가 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라고 속내를 읽은 듯이.

그러나 간혹 여러가지 이유로 이러한 친절이 불친절 또는 불편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번에는 많이도 길을 잃었다. 하루에 2~3번씩은. 갈림 길인데 표식이 없다.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복불복의 심정으로 걸어갔다가 계속 리본 등의 표식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곤경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소인배처럼 불평을 늘어 놓는다.

공사장 안내판이 가로막거나, 불이 무성하게 자라서 표식을 가려버리거나, 누군가 훼손한 이유이다. 제주도 바람은 리본을 날리거나, 닳아 없어지게도 만든다. 또한 이번에는 특히 유사(?) 리본이 무수히도 많았다. 무슨, 무슨 종교와 관련된 순례길 리본이다. 흔들리는 리본만 바라보고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된다.

소통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타인을 목적지까지 이끌기 위해, 나를 따르라고, 또는 나를 따라 걸으라고 한다. 아님, 안내 표지를 만들어 놓고 타인을 이끈다. 올레길의 화살표나 리본처럼. 그러나, 정작 그 표식을 보고 걷는 이들은 친절하지 못하다거나,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물론 걷는 이의 입장에서 말이다. 그들은 갈림길에서 망설이게 되고,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맞는가 확신을 얻고 싶고, 어디쯤 걸어왔는지 알고 싶고, 얼마만큼 더 걸어야 하는지 궁금해 한다. 그런 것들을 사방을 둘러보며 절실하게 안내 표식을 찾게 된다. 무언의 소통 수단인 화살표와 리본을 말이다.

반면 “표식을 해 놓았었다”, “비록 잘 안보이더라도 분명히 해 놓았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저기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걷는 이들에게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표식은 소용이 없다.

올레길 안내소에서 길을 물어 본 적이 있다. 왜이렇게 길 찾기가 어렵고 안내가 불친절 하냐는 푸념을 뱉어냈다. 그곳의 안내를 담당하는 한 여성분의 말이 인상에 남는다. “리본이나 화살표를 찾는 재미로 걸으세요. 길을 자세히 알려드리고 싶지만, 그게 더 길을 걷는 재미일 거에요.” 무슨 말인가 했지만, 그랬다. 길에서 만난 올레지킴이 분들을 만나 그저 따라 걸은 적이 있었다. 그건 단지 그들을 따라 걷는 행위만을 하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그래서 일부러 뒤에 처져서 스스로 길을 찾아서 천천히 걸었다.

또한 걷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친절하지 않거나, 불편한 것은 그들의 관점이다. 리본 등의 표식이 보이지 않을 때(그들의 잘못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마지막 표식을 보았던 곳으로 돌아와 다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표식이 보이기 시작한다. 단지 그 당시에 그것을 못 보았을 뿐이다.

서로의 관점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안내 표식이면, 절로 감사의 마음과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래야만 주위를 여유 있게 돌아보며 주위의 숨결이 조금 더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것이 도보 여행의 목적이다.

길가에 써있는 자그마한 희미하게 보이는 입간판을 보며 미소 짓게 된다. 비록 일부분은 흐릿하게 보이지 않는 수줍은 문구들 말이다.

“날씨가 좋은데 우리 만날까요? 바람이 참 잔잔 해요. 우리 만날까요? 오늘 구름 한 점 없는데, 우리 만날까요? 아니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요. 우리 만날까요?”

6일동안 걸었다. 총 9개 코스 150km를. 당초 하고자 했던 것은 다 했다. 우선 21코스, 마지막 올레길까지 걸었다. “걸으멍”은 했다. 그러나 “놀멍”과 “쉬멍”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면 어떠리. 다음이라는 단어가 좋은 것은 미래에 좋은 것을, 즐거운 것을 할 수 있다는 “빈틈의 미학”때문 아니겠는가?

이번 여행에서는 물집이 아닌 발가락의 고통으로 고생을 했다. 발톱 하나는 봉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어떠하리. 이렇게 충분한 광합성과, 어느 촌부의 웃음과, 그리고 흐트러진 풍광과 바람에 대한 대가로 그것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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